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앤서니 이든 (문단 편집) === 총리 재임 시기 === 총리직에 오르자마자 시행된 선거에서 이든이 이끄는 보수당은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을 40석의 의석 차이로 여유있게 제쳐버렸고, 그렇게 이든의 앞날은 탄탄대로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든 내각이 채택한 긴축정책은 영국인들의 불만을 샀고,[* 애틀리 내각 이후로 복지국가를 선언한 영국은 이 시기에 이르면 거의 모든 산업과 기구가 국유화됐던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긴축정책을 펼치니 경제가 얼어붙을 수 밖에...] 결정적으로 물품세를 20%나 한 번에 인상해버린 것이 불만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흔들리던 이든 내각에게 치명타를 날린 것은 바로 [[중동]] 문제였다. 1954년 2월 [[이집트]]에서 소장파 장교 [[가말 압델 나세르]]가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에 오른다. 대통령에 오른 가말 나세르는 당시 이집트의 적대국이었던 [[이스라엘]]과의 군비경쟁을 보다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미국 역시 소련이 중동으로 세력을 뻗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세르를 우군으로 삼는 데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나세르는 미국을 버리고 동유럽에서 무기를 수입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심기가 불편해진 미국은 이집트에 [[차관]]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해 버린다. 차관 제공 거부에 격분한 나세르는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해버렸다. 당시 영국은 수출입의 30% 가량을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여 진행하고 있었고 수에즈 운하가 막힌다면 이는 영국에게 극대한 타격으로 다가올 것이었다. 결국 이든 내각은 프랑스, 이스라엘과 협력관계를 맺고 이집트를 공격하는 초강경 대응을 택한다. 자세한 사항은 [[수에즈 전쟁]] 항목 참고. 이집트 공격 자체는 군사적으로 성공적이었지만, 제국주의 시기에나 자행되던 내정간섭이 제국주의가 끝나고도 이루어져 영국 내외에서 엄청난 비판에 맞닥뜨려야만 했다. 급기야 영국의 우방 [[미국]]조차도 영국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영국은 이 일대에서 군대를 철수시켜야만 했다. 심지어 이든 본인의 건강상태도 최악이었다. 1953년 담석 제거수술 도중 담관에 손상이 갔는데, 그 후유증 때문에 툭하면 감염증, 담도폐쇄, 간부전에 시달렸던 것. 1956년에는 담관염으로 인해 열이 41도까지 치솟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증상 완화를 위해 의료진은 이든에게 '''[[암페타민|벤제드린]]을 처방'''했다. 그것 때문에 이든은 극심한 불면증과 감정기복 등에 시달려야 했고, 다우닝 가로 이사온 초기에는 관저 앞을 지나는 [[오토바이]] 소리에도 잠을 설쳐대곤 했을 정도였다. 즉, 수에즈 전쟁이라는 심각한 상황에서 총리가 질병과 약의 부작용 때문에 끙끙대며 판단을 내렸다는 의미이다. 이런 국제적인 망신으로 이든의 정치적 위신은 엄청난 손상을 입게 됐고, 결국 1957년 이든은 반강제적으로 총리직에서 사퇴해야만 했다. 이든으로는 총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보수당 중진들이 사퇴 압박을 장난아니게 넣었다. 이든이 총리직에서 사퇴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행한 연설은 "당신들은 나를 버렸습니다. 나를 버렸습니다." 이든의 후임 총리로는 [[해럴드 맥밀런]]이 지명된다. 총리직 사퇴 이후 회고록 저술과 여행 등에 전념하던 이든은 1977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